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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하11:1-13 말씀으로 무장하고 깨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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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오늘 이 새벽에 알파교회 새벽기도회에 참여하시고 또한 온라인으로 말씀을 들으시는 여러분 모두에게 우리 주님의 평강이 가득 넘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 해가 돌아와” 해가 돌아왔다는 것은 봄이 되었음을 뜻합니다. 이스라엘의 겨울은 우리나라만큼 춥지는 않지만, 우기이기 때문에 비가 와서 전쟁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봄이 될 때, 쉬었던 전쟁을 다시 시작한다고 합니다. 그 때 다윗은 요압과 그의 직속 부대와 온 이스라엘 군대를 암몬의 수도 랍바를 공격하기 위해 보냈는데, 자신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 전쟁을 수행하는 것은 왕들의 임무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윗도 대부분의 전쟁에 참여했었고, 참여하였던 수 많은 전쟁에서 승리를 했었죠. 그러나 이제는 주변 국가들도 거의 다 정복하고, 권력의 정점에 이르자 전쟁의 수행을 자신이 직접하지 않고 요압에게 맡깁니다. 대표적인 경우가 어제 우리가 함께 살펴보았던 암몬과의 전쟁에서 다윗은 자신이 직접 전투에 참여하지 않고, 요압을 보내었었죠.
2절 말씀을 보시면, 저녁 때에 다윗이 그의 침상에서 일어나 왕궁 옥상에서 거닐다가 그 곳에서 보니 한 여인이 목욕을 하는데 심히 아름다워 보이는 것입니다. 사실 다윗은 여기에서 끝냈었어야 하죠. 그냥 아름다워 보이는 정도에서 끝냈었어야 했던 것입니다. 이 세상에 아름다워 보이는 사람이 한 둘입니까? 아름다워 보인다고 다 어떻게 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다윗은 중단하지 못했습니다. 3절 말씀을 보시면, 사람들을 보내 그 여인을 알아보게 했죠. 그랬더니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아내라는 것이죠. 이것을 알았다면 어떻게 해야합니까? 중단해야죠. 안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여기까지도 사실 다윗에게는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중단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면서 4절 말씀을 보시면, 다윗이 전령을 보내어 밧세바를 자기에게로 데려오게 하죠. 그리고 밧세바와 동침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참 아이러니 한 것은 우리들이 보통 드라마를 보게 되면, 단 한번의 관계였는데, 임신하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까? 이와 같은 드라마의 아주 클래식하고 고전적인 이야기가 바로 다윗의 이야기입니다. 단 한번의 동침이 임신으로 이어지게 되죠.
그러자 다윗은 자신의 죄를 숨기기 위해 또 다른 죄를 저지르기 시작하는데요. 다윗은 요압을 시켜서 우리아를 복귀시키죠. 그리고 우리아를 집으로 보냅니다. 일부러 밧세바와 관계를 맺게 하기 위함이었죠. 하지만, 우리아는 충직한 사람이었습니다. 9절 말씀을 보시면, 집으로 가지 않고, 부하들과 더불어 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우리아를 불러다가 묻죠. 왜 집으로 가지 않았냐고, 그러자 우리아가 다윗에게 이와 같이 대답합니다. 11절 말씀입니다.
[삼하11:11] 우리아가 다윗에게 아뢰되 언약궤와 이스라엘과 유다가 야영 중에 있고 내 주 요압과 내 왕의 부하들이 바깥 들에 진 치고 있거늘 내가 어찌 내 집으로 가서 먹고 마시고 내 처와 같이 자리이까 내가 이 일을 행하지 아니하기로 왕의 살아 계심과 왕의 혼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나이다 하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아는 이처럼 충성스러운 자였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래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자신의 죄를 숨기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우리아가 집에 가서 반드시 그의 아내 밧세바와 관계를 맺게 해야만 했었죠. 그런데, 이번에도 우리아는 집에 가지 않고 부하들과 더불어 잠을 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여기까지이구요.

말씀으로 무장하고 깨어 있으라

그렇다면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교훈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우리들은 항상 말씀으로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 2절을 보시면, 어느 날 저녁에 다윗이 우연히 왕궁 옥상에서 거닐다가 한 여인이 목욕을 하는 것을 보았는데, 심히 아름다워 보였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인생을 살면서, 외모적으로 아름답고, 예쁘고, 멋있는 사람들 가끔 보게 되죠. 하지만, 그러한 사람들을 봤다고 해서 항상 죄를 짓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 나오는 다윗과 같이 죄를 짓고 싶을 정도로 아름다워 보였다는 것은 일상적인 상황이 아니라 지금 현재 내가 사탄에게 유혹을 받고 있는 상황인 것을 인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3장에서 하와는 뱀의 유혹을 받게 되죠. 그런데,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창2:9 말씀에 등장하는데, 하와가 아담의 갈빗대로 만들어지는 시점은 창2장 후반부라는 것이죠. 그러니까 하와가 만들어기지 전부터 이미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존재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뱀으로부터 유혹을 받기 전에는 아무렇지도 않은 나무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언제부터 그 나무의 열매가 특별해지기 시작한 것입니까? 뱀으로부터 유혹을 받고 난 이후부터이죠. 그렇게 따먹고 싶지도 않고, 그냥 일상적인 열매에 불과해보였던 열매가 뱀에게 유혹을 받고 난 이후 특별해 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도 그럴 것이 사탄이 하와를 유혹할 때 사용한 유혹은 아주 강력한 유혹이었습니다. 사탄이 주로 우리 인간들을 유혹할 때 사용하는 방법은 3가지가 있죠. 여러분들도 잘 아시는 말씀이죠. 제가 요일2:16 말씀을 읽어드리겠습니다.
[요일2: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방금 읽어드린 말씀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과 같이 사탄이 인간들을 유혹할 때 사용하는 방법은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 이 세 가지인데, 사탄은 하와에게 이 세 가지를 동시에 사용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뱀의 유혹을 받고 난 이후 하와의 눈에 비친 열매의 모습은 어떠했습니까? 창3:6절 말씀이죠.
[창3:6a]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먹음직도 하고, 육신의 정욕이죠? 보암직도 하고, 안목의 정욕이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 즉 이생의 자랑인 것입니다. 어쩌면 이와 같이 강력한 유혹이었기에 하와가 뱀의 유혹에 넘어가게 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다윗도 마찬가지죠. 다윗도 사탄의 유혹을 받았습니다. 안목의 정욕, 육신의 정욕과 같은 유혹을 받은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사탄으로부터 이와 같은 유혹을 받았을 때, 만약 영적으로 깨어 있다면, 아 내가 지금 사탄으로부터 유혹을 받고 있구나 인지하고, 그 순간 곧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령하며 사탄아 물러가라 선포해야 하거든요.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하기가 너무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유혹은 언제나 너무 달콤하고, 그 유혹에 나 자신을 맡기고 싶은 정욕이 우리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마음이 들지 않는다면, 유혹이라 말할 수 없겠죠.
그러면, 우리들은 어떻게 사탄의 이와 같은 영적 공격으로부터 승리할 수 있을까요? 시편 1편 말씀을 보면 1절 말씀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시1:1]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시편1편1절 말씀은 우리가 사탄의 유혹을 받아 죄악에 빠지게 되는 단계를 설명해주는 말씀인데요. 최초 우리가 사탄에게 유혹을 받았을 때,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따르지 말아야 하는데요. 시1편에서 ‘꾀’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에차’라는 단어인데, 충고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단어가 구약 성경 다른 본문에서 어떻게 번역이 되었는가하면, 대부분 계략이라고 번역이 되었습니다. 제가 생각할 때에는 꾀라는 의미보다는 계략이라는 의미가 더 잘 와닿는 것 같습니다. 이와 같이 악의적인 목적으로 사탄이 우리에게 미끼를 놓았을 때 우리들은 걸려들지 말아야 하는데, 대개 그렇지 못하죠. 그렇기 때문에 악인들의 계략에 넘어가게 되면, 그 이후 죄인들의 길에 서게 되고,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시1편에 나오는 ‘길에 서다’, ‘자리에 앉다’라는 표현은 둘 다 원어적으로 “거주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돌이킬 수 없는 죄악의 구렁텅이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윗의 상황이 바로 이러한 상황이었죠. 앞서 말씀드렸지만 다윗은 최초 밧세바를 보고 사탄으로부터 유혹을 받았을 때, 자신의 죄악을 멈출 수 있는 기회가 여러번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러질 못했죠. 그렇기 때문에 죄인의 길에 서게 되고,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게 되고, 결국은 죄악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아예 죄악 속에 거주하고 머물고 마는 최악의 경우를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심지어 자신의 죄악을 숨기기 위해 충심이 깊었던 우리아를 죽이는 엄청난 죄악을 저지르고만 것입니다. 그런데 시1:1 말씀에서 복 있는 사람은 이와 같이 사탄이 유혹할 때 가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다고 말씀하고 있죠.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2절 말씀에 나오는데요.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시1: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그 이유는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며, 그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삶을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능력이 있습니다. 앞서 제가 에베보서 말씀에서도 언급했었지만, 하나님의 전신갑주 가운데 유일한 공격무기가 하나님의 말씀 곧 성령의 검이었었죠.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가 무장하고 있으면 사탄이 무서워서 공격을 할 수가 없습니다. 설령 공격을 한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순간 사탄은 패배하고 도망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탄이 거짓과 어두움의 영으로 공격할 때, 우리가 말씀으로 무장하여 진리와 빛의 영으로 공격하면, 악한 사탄 마귀는 그 진리와 빛 앞에 굴복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말씀으로 깨어 있는 것이 너무 중요한 것입니다.
말씀을 마무리 하려고 합니다. 오늘 한 가지 말씀드렸습니다. 말씀으로 깨어 사탄과의 영적 전쟁 가운데 승리하시는 여러분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리하여 시편1편 3절 말씀과 같이 오늘 하루도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같이 철을 따라 열매는 맺으며, 여러분들이 하시는 모든 일들이 형통케되는 은혜가 넘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