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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거리
할렐루야 오늘 이 새벽에 알파교회 새벽기도회에 참여하시고 또한 온라인으로 말씀을 들으시는 여러분 모두에게 우리 주님의 평강이 가득 넘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21절 말씀을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삼하14:21] 왕이 요압에게 이르되 내가 이 일을 허락하였으니 가서 청년 압살롬을 데려오라 하니라
어제 본문에서 다윗은 드고아의 여인의 일이 요압의 계획이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요압에게 어떠한 책망이나 언급도 하지 않고, 압살롬을 데리고 오라고 합니다. 그런데, 다윗은 압살롬을 ‘나의 아들’이라고 부르지 않고, ‘청년’이라고 했는데, 그 이유는 압살롬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기 위함이었던 것 같습니다. 실제로 다윗은 압살롬과 거리를 두는데요. 오늘 본문 말씀 24절 말씀을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삼하14:24] 왕이 이르되 그를 그의 집으로 물러가게 하여 내 얼굴을 볼 수 없게 하라 하매 압살롬이 자기 집으로 돌아가고 왕의 얼굴을 보지 못하니라
방금 읽은 말씀과 같이 다윗은 압살롬을 그의 집으로 보내면서, 자기 얼굴을 보지 않게 하라고 명령하죠. 다윗의 명령이 너무 단호했기 때문에 압살롬은 그 명령을 시행할 수 밖에 없었고, 자기 집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압샬롬은 그 후로 2년 동안이나 다윗의 얼굴을 보지못했습니다. 28절 말씀을 제가 읽어드리죠.
[삼하14:28] 압살롬이 이태 동안 예루살렘에 있으되 왕의 얼굴을 보지 못하였으므로
이 정도까지 다윗이 거리를 둘 줄 압살롬은 몰랐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 입장에서도 압살롬과 거리를 둘 수 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었겠죠. 우선은 백성들의 이목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을 뿐더러 아마 개인적인 앙금도 완전히 풀리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압살롬 입장에서도 기분이 좋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압살롬은 자신을 예루살렘으로 데려온 요압을 통해 왕을 만나고 싶었는데, 요압도 전과는 달리 압살롬의 요구에 응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아직도 다윗이 압살롬에 대하여 앙금이 남아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고, 다윗이 압살롬을 대하는 태도를 통해 압살롬이 다윗의 후계자로 이스라엘의 왕이 될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판단했겠죠. 그러니 더더욱 압살롬을 만날 이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압살롬은 다윗을 만나기 위해 비상수단을 사용합니다. 종들을 시켜 요압의 보리밭에 불을 지르는 과격한 행동을 저지르는 것입니다. 이 일을 통해 우리가 압살롬에 관하여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첫 번째로, 압살롬은 필요하면 얼마든지 극단적인 행동을 저지를 수 있는 인물이라는 것이고, 두 번째로, 압살롬에게는 주인의 어떠한 명령이라도 수행하는 충성스러운 병사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 일로 인해 압살롬은 다윗을 만나게 되는데요. 오늘 본문 말씀의 줄거리는 여기까지입니다.
먼저 화해하기를 힘쓰라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교훈은 첫 번째로, 내가 먼저 화해하기를 힘쓰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눅12:58 말씀을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눅12:58a] 네가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법관에게 갈 때에 길에서 화해하기를 힘쓰라
방금 읽은 말씀에서도 화해하기를 힘쓰라고 말씀하고 있는데요. 인생을 살다보면, 서로 간의 의견 충돌로 사이가 서로 멀어질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 당시에는 굉장히 심각한 문제인 것 같은데, 사실 시간이 또 조금 지나면 별 일도 아닙니다. 그런데, 대부분 이러한 경우들을 돌아보게 되면, 그 당시 문제가 되었던 일들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의견이 충돌되어 서로가 서로를 존중해 주지 못하고, 함부로 했던 태도가 문제가 되어 어색한 관계가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럴 때 일수록 한쪽에서 먼저 다가가 화해를 청할 때, 그 관계를 빨리 회복이 될 수 있는데요. 상대방이 먼저와서 화해를 청해주길 기다리다보면, 어색하게 지내는 시간이 점점 늘어만 가고, 그로 인해 또 다른 오해가 쌓이고, 감정의 골이 깊어지며, 관계가 더 이상 회복되기 힘들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나오는 다윗과 압살롬의 관계도 마찬가지죠. 다윗이 압살롬을 대하는 태도를 보게 되면, 다윗은 엄히 훈계해야 할 때에는 관대하게 대하고, 관대하게 대해야 할 때에는 가혹하게 대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어제 말씀과 같이 압살롬이 회개하고 돌이킬 때까지 기다려야 할 때에는 기다리지 않고, 압살롬을 이제 용납하고, 어차피 예루살렘을 데리고 왔으면, 품어줘도 될텐데, 이러한 때에는 2년 동안이나 만나주지 않고, 아주 가혹하게 대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이렇게 해서는 안되는 것이죠. 그리고 어제 말씀드린 것과 같이 시간이 모든 것을 다 해결해주지는 않죠.서로 만나지 않고, 대화를 나누지 않다보니까, 서로가 서로간에 감정의 골이 깊어져 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 주변에도 이와 같은 관계에 놓여 있는 분은 혹시 없으십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먼저 손내밀기 원하시고, 화해하길 원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오늘 하루 여러분들이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하는 분들은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먼저 연락드려보세요. 그러면 하나님께서도 여러분들에게 손 내밀어 여러분들에게 은혜 베풀어 주실 줄 믿습니다. 그와 같이 예수님께 먼저 받은 사랑, 나누고 베푸시는 여러분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무시하지 말라
두 번째로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교훈은 절대로 우리 주변에 있는 자들을 무시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압살롬을 2년 동안이나 만나 주지 않았고, 요압도 압살롬이 두 번이나 사람들을 보내었지만 만나주지 않았습니다. 압살롬의 마음에 어떠한 생각이 들었을까요? 자신을 무시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겠습니까? 자신을 무시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죠. 하루 하루 시간이 지나면서 자신이 무시당하고 있다는 생각에 너무 괴롭고 마음이 힘들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압살롬이 이와 같이 극단적이고 과격한 행동을 한대에는 다윗과 요압이 원인 제공을 한 것입니다. 특별히 요압의 경우 다윗이 압살롬을 존중히 여겼다면, 절대로 압살롬을 무시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오히려 더욱 존중히 여겼겠죠. 그런데, 압살롬이 다윗으로부터 존중 받고 있지 못하다고 생각되니까 자신이 신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왕자의 부름에 응답하지 않고 무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속된 말로 별 영양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세상 사람들은 이용가치가 있는 사람들은 존중히 여기고 이용가치가 없는 사람들은 보통 무시하죠. 돈이 없든지, 실력이 없든지, 권력이 없든지, 힘이 없든지 무엇이든지 없는 자들은 무시해버리는 것입니다. 성경시대 때에도 대표적으로 무시당하던 자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고아와 과부와 가난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시대를 초월해서 계속해서 무시를 당하던 자들이었죠. 그런데 그들을 무시하지 않았던 분이 계십니다. 그 분은 바로 하나님, 그리고 예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끊임 없이 성경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작은 자, 소외된 자 그러니까 세상 사람들이 무시하는 자들을 귀히 여기고, 존중히 여기라고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시죠. 레위기 말씀을 보면, 그와 같은 자들을 귀히 여기고, 존중히 여기고, 그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제공하는 것을 거룩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거룩이 무엇입니까? 구별된 삶이죠. 세상 사람들 다 무시하는 자들을 무시하지 않는 삶이 구별된 삶이고, 거룩한 삶인 것입니다. 특별히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자들을 보살피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시41:1 말씀을 보시면,
[시41:1] 가난한 자를 보살피는 자에게 복이 있음이여 재앙의 날에 여호와께서 그를 건지시리로다
말씀하고 계십니다. 또한 제가 마18:10 말씀을 읽어드리겠습니다.
[마18:10] 삼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주님 말씀하십니다.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고 무시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작은 자들은 누구입니까? 고아와 과부와 가난한 자들이죠. 특별히 이사야서 1장 말씀을 보시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무리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지라도 받지 않으시겠다고 말씀하시거든요. 왜 그런지 아십니까? 사1:7 말씀을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사1:17]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 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
그들이 고아와 과부를 무시해서 그들이 드리는 제사를 받지 않겠다고 말씀하시죠. 지금으로 말씀드리자면, 그들이 드리는 예배를 받지 않으시겠다는 말씀과 동일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에 우리가 무시하거나 업신여길만한 자는 단 한명도 없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무리 하겠습니다. 오늘 두 가지 말씀드렸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먼저 손 내밀고, 화해를 청하는 여러분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하고, 이 세상 그 누구도 무시하지 않고, 존중히 여기며, 그리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존중 받는 삶 사시는 여러분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