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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말
할렐루야 오늘 이 시간 알파교회 주일예배 가운데 참여하신 여러분 모두에게 우리 주님의 평강이 가득 넘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울러 온라인으로 말씀을 들으시는 여러분들 모두에게도 우리 주님의 은혜와 사랑이 가득하시길 축복합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보통 이 땅에서 삶을 살아가면서 아마도 한 가지 이상 씩은 바라고 소망하는 것들이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마다 각기 다 다를 것이고, 그 종류도 굉장히 다양하겠죠. 건강이 좋지 않으신 분들은, 건강해졌으면 좋겠다는 소망이 있으실 것이고, 억울한 일을 겪으신 분들이라면, 그 억울함이 좀 풀렸으면 좋겠다는 소망이 있으시겠죠. 그렇기 때문에 지금 이 시간 제가 여러분들께 이와 같은 질문으로 여쭤본다면, 여러분들은 아마도 지금 현재 겪고 계시는 힘들고 어려운 부분들이 속히 좀 해결되었으면 좋겠다고 답변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당장 답변하시지는 않으시겠지만,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바라는 것들 중 한 가지가 있다면, 제가 생각할 때 똑똑해 지는 것 이것을 바라고 소망하실 것 같습니다.
저도 솔직히 말씀드리면, 똑똑해지고 싶습니다. 저희 막내 아들은 궁금한 것이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하루에도 수십 번, ‘아빠 이건 왜 그래요?’ 하면서, 질문을 합니다. 되도록 그 질문에 답변을 잘 해주려고 노력하는데요. 아이가 커가면서 제가 잘 모르는 분야들도 많이 물어보더라구요. 어제도 아침 일찍 아들과 어디를 좀 다녀왔는데, 안개가 자욱히 내려 앉아 있는 것입니다. 그러자 아들이 저에게 이렇게 물어봅니다. ‘아빠, 안개는 왜 생겨요?’라고 질문하는데, 구체적으로 답변을 못하겠더라구요. 이러한 부분들은 인터넷으로 자료를 찾아보면 금방 찾을 수 있지만, 깊이 있는 성경 지식이나 특별히 성도님들이 겪는 신앙의 문제 같은 경우에는 금방 명쾌한 해답을 찾아낼 수가 없더라구요.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문제에 직면하게 되면, 저 자신에 대해 부족함을 많이 느끼게 되고, 아 나도 좀 똑똑해졌으면 좋겠다는 그러한 마음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마음은 저만 가지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의 바램인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머리 속에 많은 지식을 쌓기 원하구요. 책도 읽고, 공부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똑똑해진다는 이 표현을 다르게 표현하면 지혜로워진다고 표현할 수 있겠죠.
지혜로워지길 소망하는 이유
그렇다면 왜 이 세상 많은 사람들은 지혜로워지길 소망할까요? 그 해답을 찾기 위해, 지혜로워지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보면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는데요. 제가 만약 지혜가 있는 사람이라고 가정해보겠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지혜가 있으니 생각하는 것마다 항상 옳은 생각만 하는 사람인 것이죠. 다른 그 누군가 저에게 질문하면, 저는 제 생각이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제 생각을 당당하게 답변해 줄 수 있겠죠. 그러므로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정받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좀 더 나아가서, 때로는 다른 사람들과 생각이 다르고 의견에 충돌이 발생하는 상황도 생길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한 경우에, 나 자신이 지혜가 있고 나의 생각이 항상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내 의견을 접지 않고 계속 주장하게 되겠죠. 그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상대방과 의견의 충돌이 일어나게 되겠죠. 따라서, 이 세상 많은 사람들이 똑똑해지고 싶고, 지혜로워지고 싶은 그 마음의 배경에는 표면적으로는 선한 의도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 마음 내면 깊은 곳에서는 다른 사람들에게 나 자신의 지식을 과시하고 싶은 마음 있고, 또한 내가 가진 지식으로 인해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우위를 점하고 싶은 그러한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땅 위의 지혜가 가진 속성
그렇기 때문에 오늘 본문 약3:15 말씀에서는 이와 같은 지혜를 땅 위의 지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약3:15 말씀을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약3:15]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땅 위의 것이요 정욕의 것이요 귀신의 것이니
방금 읽은 말씀에서 이러한 지혜는 어떠한 지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땅 위의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15절 마지막 부분에 언급되어 있는 것처럼, 그 지혜 속에 정욕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 주변에도 그런 분들 계실지 모르겠는데요. 상대방이 인정해 주지 않는데도, 본인 스스로가 굉장히 지혜 있는 줄로 착각하며 살아가시는 분들이 의외로 많이 있습니다. 공동체 안에서 대화를 나누다보면, 항상 자기 생각만 옳다고 주장하시는 분들이 참 많이 있죠. 이 분들의 독특한 대화법이 있는데요. 어떤 한 분이 무언가 의견을 제시하면, ‘아니 그게 아니고’하면서 대화에 끼어들어 계속해서 자기 주장만 주구장창 말씀 하시죠. 상대방의 의견은 귀 담아 들으려 하지 않고, 항상 자기 의견만 옳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분들이 있는 곳에는 항상 오늘 본문 약3:16 말씀과 같은 상황이 발생하게 됩니다. 16절 말씀을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약3:16]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라
이와 같이 자기 자신이 똑똑하다고 생각하고, 지혜가 있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가득한 곳에는요. 방금 읽은 말씀과 같이 시기와 다툼이 있구요.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이 가득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시기와 다툼과 분열과 혼란이 가득 곳에 과연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까요? 그렇지 않죠. 그렇기 때문에 방금 전 읽은 15절 말씀, 제일 마지막 부분에, 이와 같은 지혜를 뭐라고 평가하고 있는 줄 아십니까? 귀신의 것이라고, 사탄의 것이라고 까지 평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보시기에 너무 악하다는 것이죠. 아무리 지식이 많고, 똑똑하다고 하더라도, 그 지식과 그 똑똑함이 공동체 안에 다툼을 불러 일으키고, 분열을 불러 일으키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 지식과 그 똑똑함은 귀신의 것이 되고, 사탄의 것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분열과 다툼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되는 것만이 하나님의 것이 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가 되지 못하는 이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공동체가 어떻게 해야 하나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을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도 그들이 속한 공동체가 하나가 되길 원합니다. 남편과 아내가 사이 좋게 하나가 되길 원하고, 부모와 자식들이 하나가 되길 원하며, 그들이 함께 하는 모든 공동체가 하나가 되길 원하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의 경우에는 교회와 성도들이 하나가 되길 원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가 되길 원하는 자들이 하나가 될 수 있도록 진정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있다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들은 종종 하나가 되길 원하지만, 하나가 될 수 있도록 우리들이 정한 그 기준이 잘못 되었습니다. 우리들이 보통 하나가 되기 위하여 정해놓은 기준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내가 기준입니다. 내 생각이 기준인 것입니다. 상대방과 의견이 충돌할 때, 내가 상대방의 생각을 인정하고, 상대방의 의견을 수용하는 방식으로 하나 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생각이 나와 같은 생각으로 바뀌어서 하나가 되길 원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12년 전쯤인 것 같은데요. 제가 서울에서 사역을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명절이었는데, 저희 부모님께서 역귀성을 하셨어요. 부모님과 명절을 잘 보내고, 이제 내려가시는 마지막 날이 되었습니다. 제 입장에서는 부모님과의 마지막 식사니까 맛집에서 식사를 하고 서울역에 모셔다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저희 아내는 반대인 것입니다. 차가 막힐 수도 있는데, 불안하게 왜 맛집에 가서 식사를 하냐는 겁니다. 일단 서울역에 도착해서 안전하게 식사를 하고, 보내드리는 것이 낫지 않겠냐는 것이죠. 합리적이죠. 그런데, 저는 그 이야기를 들으니까 또 속상한 겁니다. 우리 부모님 맛있는 것 대접해드리고 싶어서 한 얘기이고, 시간에 맞게 모셔다 드릴 수 있을 것 같은데 안된다는 것이죠.
지금 어떠한 상황입니까?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죠. 대부분의 사람들이 겪는 상황이 바로 이러한 상황입니다. 만약 서로 간의 주장 속에서, 옳고 그름이 있는 상황이라면, 옳은 쪽을 선택하면 됩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겪는 대부분의 상황은 옳고 그름이 있는 상황이 아니라, 자기 나름대로의 논리가 있는 상황이라는 것이죠. 그런데 더 큰 문제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와 같이 의견이 충돌될 때, 상대방과 의견을 조율하고 하나가 되는 방식에 있어서, 두 사람이 똑같이 어떻게 하나가 되려고 하냐 하면, 내 의견을 수용하는 방식으로 하나가 되려고 합니다. 그러니 절대로 하나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왜 내 의견을 수용하는 방식으로 하나가 되려고 하겠습니까? 내 생각이 옳다는 것입니다. 내가 지혜가 있고, 내가 똑똑하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인 것이죠. 그러므로 오늘 본문 야고보서 15-16절 말씀과 같이 땅의 지혜가 있는 곳에는 시기와 다툼이 있고,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이 가득한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동의하실 것 같은데요. 제가 생각할 때, 우리 나라에게 가장 똑똑하고, 지혜가 있으며, 공부 많이 하신 분들이 모여 있는 곳있는데, 저는 그 곳이 국회인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이 분들은 국회의원이 되기 위해 유세를 하지 않습니까? 유세를 할 때, 이 분들이 주로 하시는 표현들이 있죠. “우리 지역구의 발전을 위해 가장 일 잘하고, 가장 필요한 사람이 바로 저 아무개입니다.” 보통 이렇게 유세하지 않습니까? 오늘 제가 설교에서 앞서 언급했던 표현으로 방금 말씀드린 국회의원들의 유세 내용을 바꾸어 표현하자면, “우리 지역구의 발전을 위해 가장 똑똑하고, 가장 지혜있는 자가 바로 저 아무개입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표현 아니겠습니까? 이러한 분들이 모여 계신 곳이 바로 국회죠. 그러다 보니 뉴스를 통해 나오는 국회에 대한 소식을 들으면 서로 헐뜯고 다투는 모습 밖에 없죠. 국민들을 위한 정치보다는 상대방의 단점을 찾는 것에만 급급해 있어 보입니다. 그리고 한쪽에서 어떠한 정책과 법안을 상정하면, 그 정책과 법안이 좋은 것이든, 좋지 않은 것이든 그것이 중요하지 않죠. 그냥 덮어놓고 반대부터 합니다. 즉,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왜 이렇게 다툴까요? 오늘 본문 15-16절까지의 말씀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이들의 지혜는 땅 위의 지혜이고, 정욕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지혜가 가진 속성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런데 하나님의 지혜는 다릅니다. 17절 말씀을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약3:17]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나니
방금 읽은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의 지혜는 어떠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다고 말씀하고 있죠. 그런데, 하나님의 지혜의 여러 특징들 가운데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화평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동안 세상의 지혜가 있는 곳에는 시기와 다툼과 분열과 혼란만이 가득했었는데, 하나님의 지혜가 있는 곳에는 그와는 정반대인 화평이 있기 때문입니다. 즉 샬롬이 있고, 하나됨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17절 말씀에서 언급하고 있는 하나님의 지혜로 말미암아 나타나는 속성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점이 있는데요. 그것은 바로 이 모든 속성들이 다 대인 관계 속에서 드러나는 속성들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혼자서 화평하실 수 있나요? 아니면 자기 자신에서 관용하십니까? 그리고, 양순의 의미는 어질고 순하다는 의미인데, 여러분들은 스스로에게 어질고 순하십니까? 뿐만 아니라, 스스로에게 어떻게 긍휼하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또한 스스로에게 편견과 거짓이 없으실 수 있으신가요? 없죠. 그런 말 자체가 성립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혜라고 하는 것은 그 자체가 사랑과 마찬가지로 관계적 언어이며,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영향력을 끼치는 속성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세상 수 많은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기 위해서는 반드시 위로부터 내려 온 지혜, 즉 하나님의 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가 말씀하고 있는 이유
오늘 본문 말씀에서 사도 야고보가 이와 같이 말씀하고 있는 이유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 13절 말씀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죠.
[약3:13]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냐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
야고보 사도의 서신을 받은 공동체 가운데에는 방금 읽은 말씀처럼 스스로 지혜와 총명이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니까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여, 겸손하지 못하고, 교회의 다른 지체들에게 좋지 못한 영향을 끼치는 자들이 많았다는 것이죠. 약1:26 말씀을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약1:26]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이들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나 정도면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구요. 약3:1 말씀입니다.
[약3:1]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
이들은 또 어떤 자들이었냐하면, 선생이 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죠. 그러니까 이들은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려고 들고, 말을 함부로 많이 하는 자들이었다는 것이죠. 또한 약4:11 말씀을 제가 읽어드리면,
[약4:11a] 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또한 이들은 자신의 의견과 생각이 다른 경우 상대방을 비방하고, 판단하는 자들이었고, 마지막으로 약5:1 말씀을 제가 읽어드리면,
[약5:1] 들으라 부한 자들아 너희에게 임할 고생으로 말미암아 울고 통곡하라
심지어 이들은 물질적인 부요함까지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세상을 살면서 아쉬울 것이 전혀 없는 자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 안에 시기와 다툼과 분열과 혼란이 가득할 수 밖에 없었고, 교회 공동체가 하나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야고보 사도는 이와 같은 자들에게 너희들의 지혜는 땅 위의 것이요, 정욕의 것이요, 귀신의 것이요 사탄의 것이니, 위로부터 내려오는 하나님의 지혜를 가지고, 화평하게 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혜의 온유함을 나타내는 삶
그러면, 우리들은 어떻게 할 때, 위로부터 내려온 지혜, 그러니까 하나님의 지혜를 소유하고 있는 자로, 세상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나타낼 수 있을까요? 그 힌트가 오늘 본문 말씀 13절에 나오는데, 13절 말씀을 다시 읽어드리겠습니다.
[약3:13]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냐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
방금 전 읽어 드린 말씀에 의하면 진짜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들, 그러니까 하나님의 지혜를 소유한 자로써 그들이 해야할 일이 있는데, 그것은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을 행함으로 보여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는데요. 방금 읽은 이 말씀에서 우리가 중요하게 보여야 할 단어, 한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선행이라는 단어입니다. 성경에서 헬라어로 선이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는 보통 ‘아가토스’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아가토스’라는 단어는 ‘본래부터 선한 것’, ‘선이라는 특성을 지난 것’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방금 전 읽은 말씀에서 야고보는 이 ‘아가토스’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야고보가 사용한 단어는 ‘칼로스’라는 단어인데요. ‘칼로스’라는 단어가 가진 의미는 ‘사랑스러운, 아름다운’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13절 말씀에 나오는 선행이라는 표현을 직역하자면 “사랑스러운 행동, 아름다운 행동”이라는 의미인데요. 그러므로 오늘 본문 13절 말씀에서 언급하고 있는 선행이란 말이 가지고 있는 본래적 의미가 무엇이냐면, 우리의 행동을 보는 사람, 그 누구에게나 우리의 선함이 명백하게 드러나는 생활 방식을 의미하는 것인데, 쉽게 말씀드리면, 말 그대로 착한 행동이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 그 어떤 사람들이 보더라도, 착한 행동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야고보 사도가 생각하고있는 특별한 착한 행동이 있습니다. 13절 말씀에 의하면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여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것이 가지고 있는 의미는 ‘언제나 온유함이라는 특징을 지니는 지혜로’ 착한 행동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마11:29 말씀을 읽어드리겠습니다.
[마11: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고, 그러므로 온유라고 하는 성품은 곧 예수님의 성품인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하늘의 지혜를 가진 자들은 그가 가진 지혜를 세상에 드러낼 때, 온유한 마음을 가지고, 그 지혜를 세상에 나타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온유함 가진 힘이 있는데요. 온유함이 있는 곳에는 시기와 다툼과 혼란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사탄은 항상 분열을 조장하는데, 온유함이 있는 곳에서는 사탄이 힘을 쓸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온유함은 예수님의 속성이거든요. 그러므로 온유함을 드러낸다는 것은 예수님을 드러내는 것과 동일하기 때문에 사탄이 분열을 일으키고 싶어도 아무런 영향력을 끼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님의 성품을 소유한 온유한 자가 될 수만 있다면, 우리들을 통해 우리들이 속한 공동체가 화평한 곳이 될 수 있고, 하나님의 샬롬이 넘쳐나는 곳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 우리 모두가 온유한 자가 되길 원하십니다. 그리고 모든 행동을 할 때, 온유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를 세상에 나타내기 원하고 계신 것입니다. 지금 현재 우리나라는 왜 이렇게 혼란스러울까요? 왜 이렇게 동서남북으로 갈라져 분열이 되어 있을까요? 심지어 요즘은 남녀노소로도 갈라져 있죠. 제가 생각할 때, 이와 같이 혼란스럽고 분열이 된 이유는 자기 자신이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실제로도 우리 나라 사람들 너무 똑똑하죠. 교육열도 너무 높아 교육 수준도 세계 최고 수준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지혜는 땅 위의 지혜라는 것입니다. 진짜 지혜가 많은 사람이라면, 이 세상이 이로운 방향으로 나아가는데 쓰임을 받아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 나라는 지혜가 가장 많은 사람들이 자기 배불리기에만 급급해 있습니다. 뉴스를 보면, 나라를 다스리는 자들, 그러니까 지혜가 많은 자들의 부정부패 소식이 끊이지 않고 있죠. 왜 그렇습니까? 이러한 지혜들은 정욕의 것이고, 귀신의 것이고, 사탄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오늘 말씀을 들으시는 저와 여러분, 우리 모두를 통해 세상을 바꾸기 원하고 계십니다. 여러분들이라도 하나님의 지혜를 소유한 자가 되길 원하시고, 특별히 여러분들의 자녀들과 여러분들의 손주들이 하나님의 지혜를 소유한 자가 되어, 세상 속에서 선한 영향력을 끼치기 원하고 계십니다. 특별히 예수님의 성품을 소유한 자로 온유한 자로 세상 속에서 화평의 도구로 귀하게 쓰임 받기 원하고 계신 것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과 같이 예수님의 성품인 온유한 마음을 가지고, 세상 속에서 위로 부터 내려온 지혜, 하나님의 지혜를 소유한 자들이 되셔서, 세상 속에서 화평의 도구로 귀하게 쓰임 받으시는 알파교회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