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엡3:8-11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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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필립 얀시”라는 미국의 유명한 기독교 작가가 있는데, 그가 쓴 책 가운데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에서 ‘필립 얀시’는 ‘은혜’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은혜는 분명히 놀라운 말이며, 우리 시대의 마지막 최고의 단어이다.” 그렇습니다. 은혜는 너무 놀라운 말이죠. 특별히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은혜는 말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놀라운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교회 안에서 ‘은혜’라는 말을 참 많이 사용하고, 그러므로 우리 기독교는 ‘최고의 은혜의 종교’라 부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속에서, 경험하기 쉽지 않고 익숙치 않은 것이 ‘은혜’인 것입니다.
오래 전 제가 영락교회에서 사역하고 있을 때의 일입니다. 한남대교를 지나서 영락교회를 가려면 남산 제1터널을 지나야 합니다. 남산 제1터널을 이용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곳을 이용하면 5분만에 갈 수 있는 길인데, 그곳을 이용하지 않으면 남산을 반 바퀴 돌아야 갈 수 있습니다. 20분 정도가 소요됩니다. 시간을 절약하려면 남산 제1터널을 이용하는 것이 훨씬 이득이죠. 그런데 남산 제1터널을 이용할 때 문제가 한 가지가 있습니다. 혼잡통행료를 부과하는 것인데, 톨게이트 비용이 무려 2000원이나 부과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신기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어떤 차가 2,000원만 내고 가면 될 것인데, 4,000원을 지불하면서 뒤에 차량의 것까지 계산할께요. 하면서 지나간 것입니다. 지금은 톨게이트 비용을 거의 대부분 교통카드로 지불하거나, 하이패스로 지불하는데, 그 당시에는 현금으로 지불할 때였습니다. 곧 이어 바로 뒷 차량이 도착했는데, 앞차가 이미 지불했으니까 그냥 지나가도 된다고 합니다. 그러자 그 차량의 운전자는 너무 어리둥절하기는 했지만, “그럼 저도 뒷 차의 비용을 지불할께요”라고 하는 일이 반복되면서, 몇 대까지는 그렇게 똑같이 뒷차의 비용을 대신 지불해 주었다고 합니다. 비용은 똑같이 지불하긴 하였지만, 앞 차량의 운전자에게 은혜를 입은 것이고, 자신도 뒷 차량 운전자에게 은혜를 베푸는 기분 좋은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기분 좋은 반응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고 합니다. 도대체 뭔데 자기에게 그런 식으로 호의를 베푸느냐는 것이죠. 뭔가 의도성이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하며 상당히 불쾌한 반응을 보인 사람들도 상당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들은 왜 이와 같이 불쾌하게 생각했을까요?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은혜를 받아본 경험이 별로 없고, 그와는 반대로 누군가에게 은혜를 베풀어본 경험 또한 별로 없기 때문인 것이죠. 즉 은혜를 입고 베푸는 것이 익숙치 않기 때문인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은혜를 받는 것이 익숙하십니까? 아니면 은혜를 베푸는 것이 익숙하십니까? 앞서 언급해드린 것과 같이 삶 속에서 은혜를 받는 것과 은혜를 베푸는 것은 정말 익숙치 않은 것 같습니다. 우리가 보통 은혜를 입었다고 말하는 경우는, 부모님이나 선생님 같은 경우에 은혜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그 외에 경우에 은혜를 입었다고 말하는 경우가 거의 드물기 때문인 것이죠. 그런데 이러한 것에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은혜는 이 세상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은혜는, 하늘에 속한 것이기 때문인 것이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은혜란 이런 것입니다. 받는 사람에게는 아무런 대가도 요구하지 않고, 주는 사람이 모든 대가를 다 치르는 선물! 그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얼마전 저희가 구치소 사역을 다녀오지 않았습니까? 만약에 범죄를 저지른 범죄자가 감옥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했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여러분들은 이러한 상황에 대해서 어떠한 생각이 드십니까? 너무 감사한 일이죠. 그런데, 이것은 우리가 그 사람이 어떠한 범죄를 저질렀는지 모르기 때문에, 감정이입이 별로 되지 않아서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언론매체를 떠들썩하게 만든 어떤 흉악한 범죄를 저지른 자가 이처럼 회심을 하였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 감사한 마음이 들까요? ‘아니 세상에 그런 흉악한 범죄를 저지른 범죄자가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지?!’ ‘아니 그런 놈에게도 은혜가 베풀어지다니!” 이와 같은 반응을 보이시는 분들이 혹시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이와 같은 반응을 보이는 것이 당연한 것일 수도 있죠. 그러므로 우리들 대부분은 세상에서 어떠한 죄를 저지른 자들보다는 나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더 낫다고, 더 의롭다고 생각하게 되죠. 그런데 성경 말씀을 읽다보면 너무 극단적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이와같이 나 자신이 다른 그 누군가보다 더 의롭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결코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8:11 함께 찾아보시겠습니까?!
[눅18: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방금 읽은 말씀에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는 자는 바리새인입니다. 그 당시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진짜 제대로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세상 속에서 죄도 짓지 않고, 제대로된 신앙인들의 표본이 되었던 자들이 바로 바리새인들이었던 것이죠. 그러므로 바리새인들의 입장에서는 방금 읽은 말씀에 나오는 토색하고 불의하고 간음하는 자들, 또한 세리와 같은 자들 보다는 자신이 의롭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당시 이와 같이 생각하는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저주를 퍼부으셨죠. 특별히 마23장 33절 말씀을 보시면,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마23:33]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라고 까지 말씀하시며, 그런자들을 향하여 구원이 없다 말씀하십니다. 즉 자기 자신을 다른 사람들보다 더 낫다고 생각하는 한, 죄에서 구원받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 이유는 이처럼 자신이 다른 자보다 더 의롭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아직도 자기 자신의 죄가 실로 얼마나 큰지 깊이 깨닫고 있지 못하고 있는 자들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반쪽짜리’ 죄인이나 ‘부분적인’ 죄인들이나, ‘그다지 흉악하지 않은’ 죄인들을 구원하러 오신 분이 아니십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죄인을 구원하러 오신 분이십니다. 즉 죄로 인하여 영원히 죽을 수 밖에 없는 자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은 죄인이십니까? 이와 같은 질문에 대부분은 인정하시죠. 그런데, 내가 정말 하나님 앞에서 흉악한 죄인인가? 내가 정말 죽을 죄를 지은 죄인인가 라는 질문 앞에서 ‘네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하기는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세상적인 기준으로 볼 때, 뭔가 심각한 죄를 지은 적이 별로 없는 것 같기 때문인 것이죠.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여러분들이 자기 자신을 심각한 죄인이라 인정하지 않고 계신다면, 여러분들은 아직도 주님께 나아갈 준비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아직까지도 진심으로 깨닫지 못한 것과 같기 때문인 것입니다.
로마서 3장 22절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다 죄인인 것입니다. 세상의 죄들은 차등이 있죠. 집행유예가 있고, 1년형이 있고, 10년형이 있고, 종신형이 있고, 사형 등이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앞에서 이 모든 죄들은 차등이 없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죄인들입니다. 영원히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인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세상적 기준으로 흉악한 죄를 저지른 자라고 해서 죄질이 크고, 경범죄를 저질렀다고 해서 죄질이 약하고, 그런 것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모든 죄의 결과는 다 똑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앞에서 심각한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제가 자꾸 죄의 이야기를 말씀드리며, 심각하게 이야기를 풀어나가는데요. 제가 이와 같이 말씀을 드리는데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은혜를 더욱 부각하기 위해서입니다.
나 자신 스스로가 심각하고 흉악한 죄인이라 인정하지 않는 한, 은혜라는 것이 별 의미가 없기 때문인 것이죠. 내가 나 자신을 의인이라 생각하는 이상,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베풀어 주실 은혜가 존재할 수 있는 공간이 전혀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은 천국에 들어가기 원하시죠. 어떻게 해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는 구원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엡2:8 말씀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엡2: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다른 그 무엇으로도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죠. 그러므로 구원은 자기 자신이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을 때 시작이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천국에 이르는 문, 그 꼭대기에 뭐라고 있여 있는 줄 아세요? ‘오직 죄인들만’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자격만 갖추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들은 죄인입니다. 우리들은 하나님 앞에서 흉악한 죄인입니다. 영원한 지옥에 떨어질 수 밖에 없는 죄인이 바로 저와 여러분 우리 모두들인 것이죠. 그런데, 우리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이 흉악한 죄인이었던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구원해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는 자기 자신이 죄인이라는 인식이 정말 중요합니다. 죄인이라는 인식이 전혀 없고, 겸손하지 않고서는 절대로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를 경험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도 바울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를 경험한 자였고, 또한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 엡 3:8 말씀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엡3:8]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방금 전 읽은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보다 더 겸손한 표현이 어디 있을 수 있을까요? 그렇다면 사도 바울은 어떻게 이와 같이 고백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 이유는 자기 자신이 주님 앞에 죄인임인 인식하고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이처럼 겸손할 수 있었던 것이죠. 말씀 한 구절 더 찾아보겠습니다. 디모데전서 1장 15절 말씀입니다.
[딤전1: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방금 전 읽은 말씀에 의하면, 사도 바울은 자기 자신이 죄인들 중에 괴수라, 죄인들 중에 가장 악한 자라고 생각하고 있죠. 그렇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자기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가 이 세상 그 어떤 자보다 크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생각하고 있었던 사도 바울이었기 때문에 그는 자신이 하나님을 위하여 일할 수 있는 것 또한 큰 은혜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에게 이와 같이 은혜를 베풀어 주신 이유가 있었습니다. 에베소서 3장 8-9절 말씀을 다함께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엡3:8-9] 8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9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추어졌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
방금 읽은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에게 은혜를 주신 이유가 있었죠. 그것이 무엇입니까? 8절 후반부 말씀에 의하면,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9절 말씀을 보시면,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추어졌던 비밀의 경륜, 즉 복음의 비밀을 세상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었던 것이죠. 즉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을 세상 속에서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로 사용하시기 위해 은혜를 베풀어주셨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런데,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베풀어 주셨던 은혜가 바울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말씀을 들으시는 저와 여러분들 우리 모두에게도 동일하게 해당되는 것이죠. 그러므로 사도 바울에게 주신 은혜의 사명이 오늘 말씀을 들으시는 저와 여러분, 우리 모두에게도 동일하게 해당되는 것임을 우리는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냐하면, 그것은 오늘 본문 10절 말씀에 나오는 ‘교회’라는 단어에서 힌트를 찾을 수 있습니다. 10절 말씀을 함께 보시죠.
[엡3:10]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셔서 그를 이방인을 위한 전도자로 세우셨다면, 이제는 교회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셔서 교회를 통하여 복음을 전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 가운데 나아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11절 말씀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엡3:11] 곧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
무슨 의미입니까? 우리가 교회의 공동체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께 먼저 받은 은혜를 세상 가운데 나아가 복음을 전하며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나누는 그와 같은 삶은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미 예정되어 있던 것이라는 겁니다. 즉 하나님의 계획하심이라는 것이죠. 그러므로 우리들은 그 하나님의 계획하심에 동참하고 따르는 자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복음을 전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지 않는 자가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앞서 이미 언급해드렸던 것과 같이 하나님 분명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주셨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세상 가운데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로 사용하시기 위해 은혜를 베풀어주셨죠. 그런데, 만약 우리가 세상 가운데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로 쓰임 받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그 은혜가 값싼 은혜가 되어버리는 것이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자신의 몸을 바쳐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 값비싼 피값이 헐 값이 되어버리는 것과 동일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그 은혜가 값싼 은혜로 전락하지 않도록 노력하는 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 알파교회가 하고 있는 5K운동 사역은 너무 귀중한 사역입니다. 노숙인들이 있는 그곳에 하나님의 시선이 있고, 경제적으로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이 있는 그곳에 하나님의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대림절 4번째 주일입니다. 대림절은 예수님의 초림과 예수님의 재림을 동시에 기념하는 날입니다. 2000여년 전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음을 기념하는 날임과 동시에 올라가신 모습 그대로 이 땅에 다시 오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며 기다리는 절기이기도 한 것입니다.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신 주님께서 하늘에 올라가시면서 부탁하신 것이 있습니다. 땅 끝까지 이르러 예수님의 증인이 되라 부탁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증인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우리들이 이 땅에서 예수님이 하셨던 것과 같은 삶을 사는 것을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우리 알파교회 성도 여러분, 오늘 이 시간 우리 모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은혜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십시다. 그리고, 하나님께 받은 그 은혜 어떻게 갚을지 생각해보십시다. 그것은 거창할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실제 생활에서 실천할 수 있는 일들을 행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일들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희생이 뒤따를 것입니다. 왜 그런가하면, 지난 주 설교 말씀처럼 우리가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된다는 것은 나 자신이 하나님께 드리는 번제가 되어 온전히 드리게 될 때, 그 향기가 드러나게 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지만 공짜는 없죠. 우리가 세상 속에서 나를 희생하고 그리스도의 향기를 나타내는 삶을 살아간다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우리가 승리의 향기를 나타내도록 해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번 한 주간도, 나의 죄를 용서해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그 주신 은혜에 보답하는 삶으로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알파교회 모든 성도들 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