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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하16:1-23 예수, 우리의 선택의 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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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오늘 이 새벽에 알파교회 새벽기도회에 참여하시고 또한 온라인으로 말씀을 들으시는 여러분 모두에게 우리 주님의 평강이 가득 넘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삼하16장 말씀인데요. 어제 말씀에 이어서 압살롬을 피해 피난 길에 오른 다윗의 이야기가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 동안 다윗이 절대적인 왕권을 소유하고 있었을 때에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인데요. 이제는 다윗의 절대적인 왕권이 무너지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다윗 편에 서 있어야 할지 아니면 새로운 지도자로 떠오르고 있는 압살롬 편에 서야 할지 그 당시 다윗의 주변에 있던 사람들의 머리는 굉장히 복잡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반드시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했었는데요. 오늘 본문 말씀을 보시면, 그 당시 사람들이 자신이 처해있는 상황과 환경 속에서 선택을 내리고 있는 다양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은 이와 관련된 말씀을 여러분들과 함께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시바의 선택

첫 번째 선택은 오늘 본문 1-4절까지의 말씀으로 므비보셋의 종이었던 시바의 선택입니다. 오늘 본문 1절 말씀을 보시면, 감람산 마루턱을 조금 지나니까 므비보셋의 종 시바가 안장 지운 두 나귀에 떡 이백 개와 건포도 백 송이와 여름 과일 백 개와 포도주 한 가죽부대를 싣고 다윗을 찾아옵니다. 다윗이 시바에게 이것이 무엇인지 물었더니, 시바는 다윗과 다윗의 가족과 수행원들을 위해 가져온 것이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면서 시바는 나귀에는 왕의 가족이 타고, 음식은 소년들이 먹게 하고, 포도주는 광야에서 기진한 자들이 마시게 하려 함이라고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는데요. 시바는 지금 자신이 매우 꼼꼼하게 다윗을 위해 양식을 준비했다는 것을 어필하고 있는 것이죠. 그 이유는 다윗의 마음에 들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이러한 시바의 설명이나 음식보다는 그가 모시고 있었던 므비보셋의 행방에 대해 더 관심을 갖습니다. 이에 시바는 므비보셋이 다윗을 따라 나서지 않고 예루살렘에 있으면서 이스라엘 족속이 므비보셋 자신에게 자기 아버지의 왕국을 돌릴 것이라고 보고 하고 있는데요. 다윗이 도망간 사이에 자신이 다윗의 왕위를 찬탈하기 위해 다윗과 함께 도망하지 않고 예루살렘에 남아 있다고 보고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런데 시바의 이 보고가 사실인가요? 그렇지 않죠? 나중에 19장에 가서 보면 므비보셋은 다윗을 배반하지 않았고, 시바가 므비보셋을 배반하고 모함한 것이 드러나게 됩니다. 그렇다면 시바는 왜 이와 같은 보고를 했을까요? 시바는 아마도 이번 기회에 자신이 모시던 자를 므비보셋에서 다윗으로 바꾸고 싶었을 것입니다. 별 볼일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므비보셋 보다는 비록 지금 현재는 위기의 상황 가운데 놓여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아직까지는 이스라엘 전체의 왕이었던 다윗을 모시는 자가 되고 싶었던 것이죠. 하지만, 과정이 틀렸죠. 왜 그렇습니까? 정직하지 못한 방법이었기 때문입니다. 위기의 상황 가운데 놓여 있었던 다윗을 돕는 것까지는 너무 좋은 방법이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모시던 자를 모함하고, 정직하지 못한 방법이었기 때문에 하나님 보시기에는 좋지 못한 선택과 방법이었던 것입니다.

시므이의 선택

두 번째 선택은 시므이의 선택인데요. 오늘 본문 말씀 5-8절까지 나옵니다. 시므이는 사울의 족속에 속한 자로, 다윗 왕이 바후림에 이르렀을 때, 나와서 다윗을 저주하는 선택을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다윗과 그의 신하들을 향해 돌을 던지기도 했었죠. 그동안 다윗의 왕권이 절대적으로 강하였을 때에는 단 한마디 아무 말도 하지 못하다가 다윗이 힘이 약하여지고, 피난을 떠나는 신세가 되니 저주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다윗을 저주했던 이유가 있었는데요. 시므이는 사울 왕가 족속들의 죽음에 대한 모든 책임이 다윗에게 있고, 그렇기 때문에 여호와께서 그와 같은 책임을 물어서 다윗이 이처럼 어려움을 당하게 되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윗이 사울 가문의 피를 흘려서 왕이 되었으니,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그 책임을 물어 이스라엘을 그의 아들 압살롬의 손에 넘기셨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런데, 이와 같은 시므이의 논리가 맞습니까? 그렇지 않죠. 우리는 사울이 왜 심판을 당했는지 다 알고 있습니다. ‘팔이 안으로 굽는다’는 속담처럼, 시므이는 자신의 족속이었던 사울의 족속이 다윗 때문에 망했다는 오해를 가지고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다윗을 저주하고 있고, 올바르지 못한 선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과 아비새의 선택

세 번째 선택은 9-14까지의 말씀으로 다윗과 아비새의 선택인데요. 시므이의 저주를 듣고, 아비새는 시므이를 죽은 개에 비유하며 그의 머리를 잘라 죽이겠다고 분노하는 선택을 하고 있는데요. 하지만 다윗의 선택은 달랐습니다. 시므이의 저주를 여호와의 뜻에 따른 저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면서, 11절 말씀을 보시면, 다윗은 자기 배에서 나온 아들이 자기 생명을 빼앗으려 하는데, 하물며 이 베냐민 사람의 저주가 대단한 일이겠느냐면서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으니 그가 저주하도록 가만히 내버려 두어라’고 말하죠. 그러면서 12절 말씀을 보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 그 저주 때문에 여호와께서 선으로 내게 갚아 주시리라’고 말하며, 모든 선택의 기준을 여호와 하나님을 두고 있는 모습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후새와 아히도벨의 선택

마지막으로 네 번째 선택은 후새와 아히도벨의 선택인데요. 어제 말씀에서도 언급했었지만, 후새는 다윗의 오랜 친구로 다윗을 선택했고, 아히도벨은 압살롬을 선택했죠. 오늘 본문 말씀에서 후새는 다윗과 약속한대로 압살롬이 있는 예루살렘으로 갑니다. 그리고는 16절 말씀을 보시면, 압살롬에게 나갈 때에 ‘왕이여 만세, 왕이여 만세’하며 나아가죠. 압살롬에게 거짓으로 투항한 것입니다. 그러자 이를 이상하게 여긴 압살롬이 후새에게 묻습니다. 왜 친구 다윗을 따라가지 않았으냐는 것입니다. 그러자 후새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와 백성과 이스라엘 모든 사람이 선택한 자에게 자신이 속한 것이며, 그와 함께 머물 것이라고 대답하죠. 그러자 압살롬은 이와 같은 후새의 답변을 듣고 흐뭇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보면, 후새의 선택은 세상 사람들이 볼 때에는 굉장히 위험한 선택입니다. 자신의 목숨을 건 선택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후새는 다윗을 선택하고, 목숨을 걸고 예루살렘으로 복귀하여 압살롬에게 거짓으로 투항하는 선택을 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후새는 왜 이와 같은 선택을 하였겠습니까? 분명 다윗과의 친분이 있기도 했지만, 압살롬은 반역을 저지른 것이고, 명분이 없기 때문에, 명분이 있는 쪽이었던 다윗을 선택하고, 비록 인간적으로 위험이 뒤 따르긴 했지만 다윗을 돕는 쪽으로 선택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와는 반대로 아히도벨은 압살롬을 선택하였는데요. 그는 철저히 실리가 있는 쪽을 선택했습니다. 백성들의 민심이 압살롬에게 쏠려 있는 것을 보고 압살롬에게 합류한 것이죠. 그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명분보다는 실리였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후새와는 반대되는 선택을 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예수, 우리의 선택의 기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들은 이처럼 다양한 자들의 선택을 보았습니다. 시바의 선택과 시므이의 선택 그리고 다윗과 아비새의 선택과 후새와 아히도벨의 선택 등 총 6명의 선택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모두 그들이 처한 상황과 환경 속에서 그들 각자가 가진 여러 이유들 속에서 다양한 선택을 하게 되었죠.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도 우리들이 속한 다양한 환경과 상황 속에서 항상 무언가를 선택 해야하는 인생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프랑스의 유명한 실존주의 철학자였던 샤르트르는 인생은 B와 D사이에 C라는 명언을 남겼죠. 즉 인생이란, Birth(출생)과 Death(죽음)사이에서 Choice(수 많은 선택)을 하며 살아가는 것이 바로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말씀을 들으시는 저와 여러분 우리 모두들도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무언가 기준을 가지고 선택을 내리는 삶을 살아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우리가 참고할 만한 첫 번째 인물은 다윗입니다. 사실 시므이의 저주를 듣고, 아비새와 같은 선택을 하는 것이 아마도 일반적인 선택일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 가운데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생각했습니다. 다윗은 한 동안에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소원한 적도 있었지만, 이내 회개하고, 회복하여, 피난을 가는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다시금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자로서 샤르트르의 명언을 인용해서 말씀드리자면, 인생은 B와 D사이에 C인데, 저는 그 C를 선택을 의미하는 C가 아니라, Christ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C로 바꾸고 싶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출생하여 죽을 때까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선택하여야 하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선택의 기준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저는 오늘 본문 말씀에 나오는 후새의 선택도 참고할 만한 선택이라고 생각이 되는데요. 우리들은 보통 조금이라도 위험하다고 생각되면, 선택하지 않고, 항상 안전한 것만 선택하는 경우가 거의 대부분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비록 안전하지 않다 하더라도, 그것이 만약 하나님의 뜻이라고 한다면, 고난을 무릅쓰고서라도 선택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자세이며, 제자의 삶인 것이죠. 이와 관련한 유명한 성경이야기가 있는데요. 행21장 말씀을 보시면 바울이 가이사랴에 도착했을 때, 빌립의 집에 잠시 머물게 됩니다. 그 때 아가보라는 한 유명한 예언자가 와서 예언하는데, 이 아가보라는 사람은 당시 최고로 유명한 예언자였는데, 행11장에서 ‘천하에 큰 흉년이 들리라’고 성령으로 예언했는데, 그 예언은 글라우디오 황제 때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그와 같이 유명한 예언자였던 아가보가 말하길 성령이 말씀하시는데,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 띠의 임자를 그러니까 바울을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주리라 예언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면, 유대인들에게 붙잡혀 로마인들의 손에 넘겨지게 될 것이라는 것이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와 같이 감옥에 갇히게 될 것이라는 반드시 이루어지는 예언을 들었으면 예루살렘으로 가야 합니까? 가지 말아야 합니까? 가지 말아야죠. 그렇기 때문에 이 예언을 들었던 모든 사람들은 바울에게 말합니다. 절대로 예루살렘으로 가지 말라고 하죠. 하지만, 바울은 No. 아니라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설령 결박을 당하고, 고난을 당한다 하더라도 예루살렘으로 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주님의 뜻이었기 때문에 그는 나아갔던 것이죠. 결국 붙잡혔지만, 붙잡혔기 때문에 로마에까지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된 것이었죠.
말씀을 마무리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주신 말씀처럼 여러분들의 선택에는 항상 예수 그리스도께서 기준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리고 설령 그 길이 고난의 길이라 하더라도, 주님과 함께 하는 길이라면 늘 순종하여, 하나님의 기쁨이 되시는 여러분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