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소개
home
목회 철학
home

단3:19-30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선택하는 자

영상설교

음성설교

줄거리

할렐루야 오늘 이 새벽에 알파교회 새벽기도회에 참여하시고 또한 온라인으로 말씀을 들으시는 여러분 모두에게 우리 주님의 평강이 가득 넘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어제 말씀의 내용은 느부갓네살 왕이 자신이 만든 금 신상에 절하라는 명령을 내렸는데, 그의 이와 같은 명령에 순종하지 않은 다니엘의 세 친구에 관한 말씀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오늘 말씀은 그 내용에 이어서 계속 진행되고 있는데요. 19절 말씀을 보시면, 금 신상에 절하지 않겠다는 다니엘의 세 친구들의 답변에 느부갓네살 왕은 분노하게 되죠. 그래서 그 풀무불의 뜨겁게 하기를 평소보다 칠 배나 더 뜨겁게 하라고 엄명을 내리게 되는데요. 그 풀무불이 얼마나 뜨거웠던지 22절 말씀을 보시면, 사드락과 메삿과 아벳느고를 붙든 사람까지도 태워 죽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결국 23절 말씀을 보시면 이들은 결박된 채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 떨어지게 되죠.
그런데 24절 말씀을 보시면, 느부갓네살 왕이 갑자기 놀라 급히 일어나서 모사들에게 질문합니다. 분명 자신들이 불 가운데 던진 자는 세 사람이 아니었느냐 질문한 것입니다. 25절 말씀을 보시면 느부갓네살 왕은 또 다시 놀라게 되는데요. 결박되지 아니한 네 사람이 불 가운데로 다니는데, 상하지도 아니하였고, 그 넷째의 모양은 신들의 아들과도 같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26절 말씀을 보시면 성격 급한 느부갓네살 왕은 직접 맹렬히 타는 풀무불 아귀 가까이까지 가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종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야 나와서 이리로 오라고 부르죠. 그 결과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불 가운데에서 나오게 됩니다. 27절 말씀을 보시면, 주변 신하들이 이 세 사람을 본즉 풀무불이 능히 그들의 몸을 해하지 못하였고 머리털도 그을리지 아니하였고, 겉옷 빛도 변하지 아니하였고 불탄 냄새도 전혀 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을까요? 28절 말씀을 보시면 느부갓네살 왕이 하나님을 찬송하게 되는데요. 28절 말씀을 제가 읽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단3:28] 느부갓네살이 말하여 이르되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그가 그의 천사를 보내사 자기를 의뢰하고 그들의 몸을 바쳐 왕의 명령을 거역하고 그 하나님 밖에는 다른 신을 섬기지 아니하며 그에게 절하지 아니한 종들을 구원하셨도다
방금 읽은 말씀에서 느부갓네살 왕이 말한 그대로가 사실이죠.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의뢰하고 그들의 몸을 바쳐 왕의 명령을 거역하고 하나님 밖에는 다른 신을 섬기지 아니하며 그에게 절하지 아니한 그 종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천사를 보내신 것이 맞죠. 뿐만 아니라 29절 마지막 부분을 보시면, 느부갓네살 왕은 이같이 사람을 구원할 다른 신이 없다고 말하며 다시금 하나님의 이름을 높여드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30절 말씀에서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바벨론 지방에서 더욱 높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선택하는 자가 되라

그렇다면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교훈은 무엇일까요? 어제부터 계속해서 이어지는 오늘 본문 말씀의 내용을 보게 되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우상에게 절하지 않는 문제로 인해 고난의 문제에 처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이들은 느부갓네살 왕이 세운 금 신상에게 절하지 않고, 신앙과 믿음을 지키려다가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목숨을 유지하기 위해 금 신상에 절하지 않을 수도 있었죠. 왜 그렇습니까? 금 신상에게 절하지 않을 경우 풀무풀에 들어가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이들은 금신상에게 절하지 않는 선택을 했었지만, 절을 하는 선택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들이 선택할 수 없는 것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이 알 수 없는 것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바로 이들이 선택한 것에 대한 결과가 어떻게 될지 이들은 선택할 수 없고, 알수도 없고, 결정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들의 이 모든 선택에 대한 결과는 누구만 정할 수 있나요? 오직 아버지 하나님만이 정하실 수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들이 만약 금신상에게 절을 하는 결정을 내렸다면, 어떠한 결과가 생겼을까요? 당장 목숨은 유지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이후의 결과를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이들은 금 신상에게 절 하지 않는 결정을 내렸죠. 이들은 이와 같은 결정으로 인해 예상되는 결과를 분명히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절하지 않는 이와 같은 결정을 내린 것입니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풀무불에 들어가게 되었을 때, 어떠한 결과가 발생하게 되겠습니까? 당연히 불에 타 죽게 되겠죠. 하지만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느부갓네살 왕에게 했던 말에 의하면 이들이 예상했던 결과는 한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두 가지였습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께서 이들을 맹렬히 불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주시거나 아니면 두 번째로 맹렬히 불타는 풀무불 가운데 건져주시지 않고 불에 타 죽도록 내버려 두시거나 하는 것이겠죠.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18절 말씀에서 이들이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라는 고백을 하였기 때문에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처럼 우리들은 무언가 선택을 해야할 때, 어떠한 것을 선택해야 할지 가치 판단을 하게 되는데요. 이와 같이 가치 판단을 하기 위해서는 기준이라는 것이 필요하죠.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와 같은 것을 결정할 때, 무엇을 기준으로 삼는가 하면, 자신이 무언가를 결정할 때 그것에 대해 예상되는 결과가 발생할지를 생각하고 선택한다는 것입니다. 힘들거나 고난을 받을 것 같으면, 선택하지 않고, 무언가 자신에게 이득이 되거나, 힘들지 않고 고난이 없을 것 같다고 판단이 되면 선택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런데, 이 모든 것들이 우리들 마음대로 될까요? 여러분들은 인생을 살아오시면서 여러분들이 예상하신대로 여러분들의 마음대로 다 되시던가요? 그렇지 않죠. 우리 마음대로 다 되는 것이라면 그것은 인생이 아니죠. 우리 마음대로 되지 않기 때문에 인생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무언가 선택을 해야할 때, 무엇을 기준으로 선택을 내려야 하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 말씀에 나오는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우리들이 어떠한 선택을 내릴 때, 무엇을 기준으로 선택해야 하는지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데요. 그것이 무엇인가하면, 예상되는 결과에 기준을 두지 말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그 뜻에 기준을 두라는 것입니다. 왜 그런 줄 아십니까? 예상되는 결과에 기준을 두고 선택할 경우에는 그 예상되는 결과가 고난이라면 그것이 아무리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이라 할지라도 절대로 선택하지 않게 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 세상 그 어느 누가 고난의 결과가 예상이 될 때 그것을 선택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예상되는 결과를 기준 삼기 보다는, 선택을 내려야 하는 그 시점에서 언제나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에 늘 기준 삼아 선택하게 될 때에, 우리는 언제나 올바른 선택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1장에 나오는 사도 바울의 경우가 이와 비슷한 경우이죠. 사도 바울이 빌립의 집에 머물 때 아가보라는 선지자가 예언하죠.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 주리라 예언한 것입니다. 그 말인즉슨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에 가게 되면 붙잡히게 될 것이라는 고난의 결과가 예측되는 상황이었던 것이죠. 그러다보니 어떻습니까? 예루살렘에 가야 합니까? 가지 말아야 합니까? 가지 말아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사도 바울은 그 주변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다 말렸지만, 예루살렘에 올라갔죠. 왜 그렇습니까? 고난이 예상되는 결과보다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이 그 무엇보다도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이뿐입니까? 예수님도 마찬가지였죠. 예수님도 잡히시기 전,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셨죠. 뭐라고 기도하셨습니까? 마26:39 말씀을 보시면,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예수님께서 왜 이렇게 기도하셨겠습니까? 예상되는 결과가 십자가였기 때문이죠. 예상되는 결과가 고난이었고 고통이었고 죽음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누가 기뻐하시는 뜻대로 행하셨습니까? 자신의 원대로가 아니라 아버지의 원대로 순종하며 행하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모든 결과를 하나님께 맡기고 나아갈 때 어떠한 결과가 나타났을까요? 그 결과는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결과가 나타나는데요. 딱히 정할 수 없는 너무나도 다양한 결과가 나타나죠. 하지만, 그 모든 결과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공통점 한 가지는 오직 아버지 하나님의 영광만이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는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하나도 불에 타지 않고 그곳에서 살아나오게 되죠.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어 보호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풀무불에서 살아나온 것보다 더 중요한 사실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 당시 최고 강한 이방 나라의 왕이었던 느부갓네살의 입에서 하나님을 향한 찬양의 고백이 나온 것입니다. 이들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에 순종했던 것으로 말미암아 아버지 하나님의 영광이 당시 최고로 강했던 이방 나라의 한 가운데에서, 그것도 최고로 강한 이방 나라의 왕의 입에서 드러나게 된 것이죠. 사도 바울은 어떻습니까? 그가 고난을 무릅쓰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감으로 말미암아 로마까지 복음이 전해지게 되고 전 유럽 사회에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되었고요.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 고난을 무릅쓰고 십자가에 못박히심으로 말미암아 어떻게 되었습니까? 이 세상 전 인류가 구원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리고, 하나님의 영광이 전 세계에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혹시나 여러분들 앞에 고난이 예상되는 일들이 놓여 있으세요? 그러면 그것에 너무 집중하시기 보다는 그 시점에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 먼저 하나님의 뜻을 구하시는 여러분들 되시길 축복합니다. 그리고 순종해 보세요. 그러면 여러분들의 그 순종을 통해 하나님께서 반드시 영광 받으시는 놀라운 일들이 생기게 될 줄 믿습니다. 그와 같이 늘 하나님 나라를 위해 귀하게 쓰임 받으시는 여러분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