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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말
할렐루야 오늘 이 시간 알파교회 주일예배 가운데 참여하신 여러분 모두에게 우리 주님의 평강이 가득 넘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현재 우리는 코로나 시대를 살아가고 있죠. 너무 장기간 지속된 코로나로 인해 우리의 일상들은 너무 많은 변화를 겪어온 것 같습니다. 특별히 코로나로 인해 우리의 삶 가운데 일상화가 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염려일 것입니다. 지금은 많이 괜찮아졌지만, 혹시 코로나에 감염이 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염려스러운 마음들이 늘 지속되었고, 사람들을 만나고, 우리들이 하는 모든 행동 하나 하나가 너무 조심스러웠던 것이죠.
그런데 이보다 우리의 염려를 더욱 커지게 만들었던 것은 뉴스를 통해 항상 들려오는 좋지 못한 경제 상황이었죠. 어제도 신문을 보니까 건설사들과 관련하여, 금융위기보다 더 큰 고통이 올 수도 있다는 기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처럼 민생경제가 어려워지게 되면, 각 가정마다 이와 같은 외부적인 힘듬으로 인해 각 가정 안에서 불화들이 많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각 가정 마다 경제적 상황이 불안정하다 보니까 마음이 평안하지 못하고, 그러다보니 서로 대화를 나눌 때,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자꾸 퉁명스럽게 대화를 나누게 되고, 그러다 보니 서로 오해가 쌓이고 불화가 생기게 되는 것이죠. 그 결과 각 가정마다 기쁨을 잃게 되고, 근심에 휩싸이게 되며, 우울한 분위기 속에서 지내게 되는 것이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 말씀에 나온는 빌립보 교회가 바로 이와 비슷한 상황이었습니다. 빌립보 교회도 외부적으로 힘든 일들이 있었는데요. 그들에게는 외부적으로 핍박과 박해가 있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 하나 만으로 그들은 수 많은 핍박에 시달렸으며, 또한 교회 공동체 안에 내부적으로 분쟁들도 있었는데요. 빌1:17 말씀을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빌1:17] 그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수하지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
이들에게는 더 많은 내부적 분쟁들이 있었지만 한 가지만 소개하자면, 방금 읽어드린 말씀처럼 복음을 전하는 방식에 있어서도 서로 다투며 분쟁하였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도 기쁨을 잃었구요. 근심에 휩싸였있었으며, 우울한 분위기 속에서 지낼 수 밖에 없었던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빌 4:4-7 말씀은 이렇게 축 처져 있던 빌립보 성도들을 사도 바울이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 쓰여진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을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 어떠한 말씀을 전했을까요? 저는 오늘 이와 같은 내용으로 여러분들과 함께 말씀을 나누기 원합니다. 따라서, 오늘 말씀을 들으시는 여러분들 가운데 혹시 외부적인 힘듬과 그로 인하여 가정 안에서 어려움을 겪고 계신 분들이 있으시다면 오늘 사도 바울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위로 받으실 수 있는 여러분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문제 제기
4절 말씀이 시작하면서부터 사도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에게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권면하고 있는데요. 빌3:1 말씀에서도 사도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에게 주 안에서 기뻐하라고 권면했었습니다. 빌3:1 말씀을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빌3:1] 끝으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
방금 읽어드린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죠. 끝으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그런데, 또 뭐라고 덧붙여 말씀하고 있습니까?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다고 언급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빌립보서 전체에서 “기뻐하라”는 내용이 무려 16번이나 사도 바울이 같은 말을 반복해서 빌립보 성도들에게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도 많이 들어보셨겠지만, 빌립보서를 “기쁨의 서신”이라고 부르는 것이죠.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 얼마나 힘이 빠져 있었으면, 바울이 이토록 기뻐하라는 말을 그토록 강조하였겠습니까? 그런데, 사실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이러한 권면을 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죠. 빌립보서가 “기쁨의 서신”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사실 “기쁨의 서신”이라는 별명은 굉장히 역설적인 별명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이유는 빌립보서가 사도 바울이 옥에 갇힌 상태에서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보낸 옥중서신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 현재 어쩌면 사형 언도로 끝날지도 모르는 재판을 앞두고 자신의 운명과 교회들의 앞날에 대해 그 누구보다도 염려하고 근심하고 있던 자였기 때문인 것이죠. 특별히 그는 자기가 사랑하는 빌립보 교회가 외부적으로 핍박과 박해를 받고 있으며, 또한 교회 안에서 내분을 겪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걱정하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을 고려해보자면, 빌립보서 말씀에서 되풀이 되고 있는 “기뻐하라”고 명령하고 있는 권면은 사실 어쩌면 사도 바울이 자기 자신에게 권면하고 있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 자신에게 먼저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도 기뻐해야 한다는 것을 적용하고 난 이후에 펜을 들어 편지를 써서 빌립보 성도들에게 보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뻐하라
사랑하는 우리 알파교회 성도 여러분, 그런데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신앙과 이성이 반비례할 때가 있죠. 그러니까 진정한 신앙이란 우리의 이성과 대항하여 “그럼에도 불구하고”라고 외치는 별도의 요소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롬4:19 이하의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믿음의 의미를 설명할 때, 아브라함의 믿음을 예로 들어서 설명했는데요. 롬4:19 말씀을 보시면,
[롬4:19]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아브라함은 자기 자신의 나이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았음과 사라의 태가 다 죽은 것을 알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지금 현재 자신의 현실에 대해 이성적으로 정확하게 판단을 내리고 있었던 것이죠.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가 어떻게 하나님을 믿었냐하면, 롬4:17-18 말씀을 제가 읽어드리자면,
[롬4:17b-18a]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방금 읽어드린 말씀에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어떻게 믿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심을 믿었죠. 이성적 판단이 어떠했음에도 불구하고 믿었다는 것입니까? 18절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요소를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뿐입니까? 여러분들 잘 아시는 합3:17-18 말씀도 동일하죠?
[합3:17]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 외양간에 소가 없는 상황이라는 것이죠.
지금 현재 우리가 처해 있는 상황을 이성적으로 판단할 때 이와 같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하겠다는 것입니까? 18절 말씀입니다.
[합3:18]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이 바로 지금 현재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말씀하고 있는 기쁨의 근거입니다. 지금 현재 빌립보서를 쓰고 있는 바울이나 그 편지를 받는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도 이성적으로 판단해 본다면 기뻐할 근거가 없고 기뻐할 수도 없다는 것이죠.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기뻐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그들이 주 안에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빌4:4 말씀을 제가 다시 읽어드리겠습니다.
[빌4:4]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이 말씀은 합3:18 말씀
18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라는 이 말씀과 동일한 말씀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주 안에서 기뻐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가 믿고 의지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고난을 가져다주는 사단의 세력을 꺾고 승리하셨기에 우리가 주님을 믿고 의지하면 주님께서 우리에게도 승리를 가져다 주실 것이기에, 주의 권능과 사랑을 힘 입어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단의 세력들이 우리에게 외부적인 핍박과 경제적 가난과 또한 우리들의 공동체 안에 내분을 일으키며 압박을 해 온다하더라도 십자가에서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사탄의 세력을 근본적으로 이기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 모든 역사들을 주관하고 계시므로, 결국에는 모든 것이 주님의 그 선한 뜻대로 이루어질 것이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 모두는 기뻐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현재 우리가 속해 있는 현실적 상황이 그 아무리 암울한 상황이라 할지라도, 우리가 진정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인이라고 한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신앙으로 기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말씀을 듣고 계시는 여러분들도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신앙으로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는 삶을 사시는 여러분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또 오늘 본문 말씀 빌4:4-6절까지의 말씀을 보시면, 네 가지의 명령어들이 나옵니다. 첫 번째는 4절 말씀에서 “기뻐하라” 말씀하고 있고요. 두 번째는 5절 말씀에서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들에게 알게 하라” 세 번째는 6절 말씀에서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 그리고, 마지막 네 번째는 6절 말씀에서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말씀하고 있는데요. 그렇게 하면 “하나님의 평강이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리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 네 가지의 명령어들 중간에 하나의 신앙 고백을 끼어 넣었는데요. 그것은 5절 말씀 후반부에 나오는 신앙 고백으로 “주께서 가까우시다”는 고백인 것입니다. 이 고백은 굉장히 중요한 신앙 고백인데요. 왜냐하면, 이 고백이 빌립보 교회 성도들로 하여금, 앞 뒤로 나오는 네 가지의 명령 즉, 기뻐하고, 관용하며, 염려하지 않고 기도할 수 있는, 이 네 가지의 명령을 이행할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해 주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주께서 가까우시기에, 그것을 힘입어 기뻐할 수도 있고, 관용을 베풀수도 있고, 염려하지 않고, 기도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께서 가까우시다”는 이 신앙 고백에서, “가까우시다”는 단어는 헬라어로 “엥귀스”라는 단어인데요. 시간이나 장소에 있어서 “가까이”에 있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가까우시다”는 이 신앙 고백은 시간적인 의미와 공간적인 의미 둘 다 가지고 있는 것이죠. 따라서 먼저, “시간적 의미”를 말씀드리자면, ‘주께서 곧 재림하시어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신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의 고난들을 참고 기뻐하며, 곧 사라져 버릴 이 세상의 사물에 대해 생각과 의견이 다르다고 서로 다투지 않고, 나에게 해를 가한 사람들에게도 관용을 베풀고, 세상적인 일들에 대해서 염려하지 않고, 도리어 기도에 전념하며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와 같은 삶을 살아가지 않죠. 왜 그렇습니까? 주께서 가까우시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빌립보서가 거의 2000여년 전에 기록되었는데, 아직까지 주님께서 재림하지 않으셨으니까, “주께서 가까우시다”이 표현이 믿어지지 않거나, 시간적으로 굉장히 멀게 느껴지는 것이죠. 하지만 그렇지 않죠.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동일하게 개인적인 종말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죽음이라는 시간을 정해놓으신 것이죠. 이와 같은 개인적인 종말을 기준으로 생각해보자면, “주께서 가까우시다”는 이 표현은 결코 틀린 말이 아닐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도 많이 느끼시겠지만, 시간이 참 빠르게 흘러가지 않습니까? 저는 아내와 이런 대화를 자주하는데요. “서로 사랑하며 살기에도 인생이 참 짧은 것 같은데, 서로 사이 좋게 아이들과 함께 행복하게 잘 살자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인생이 참 짧은데, 그 짧은 인생을 살면서 기뻐하지 못하고, 염려하고, 두려워만하다가 죽음에 이르게 된다면, 얼마나 억울하고, 슬픈 인생이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주께서 가까우시기에, 주 안에서 기뻐하고, 관용을 베풀며, 염려하지 말고, 기도하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주께서 가까우시다”는 의미를 공간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저와 여러분 우리 모두가 믿는 주님은 하늘 저 멀리 높고 먼 꼭대기에 고고히 앉아 계셔서, 우리가 이 땅에서 겪는 고난의 현실에 우리를 방치하고 계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 즉 성령으로 우리 가까이 계셔서, 아니 우리 안에 내주하셔서 우리를 돕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그리스도인들은 우리와 늘 함께 계시는 주의 권능과 사랑에 힘입어서, 고난 속에서도 염려를 극복하고 기쁨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습니다. 주께서 가까우십니다. 주님 지금 여러분들 안에 계세요. 그러므로 그 믿음으로 주 안에서 기뻐하시고, 모든 사람들에게 관용을 베푸시며,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기도로 주께서 주시는 평안을 가득 누리시는 여러분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염려하지 말고 기도하라
그러면서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6절 말씀에서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고 명령하고 있는데요. 하지만 우리가 정말 아무것도 염려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제가 지난 주 설교 말씀에서 염려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전했지만, 사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않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사실 사도 바울 자신도 재판의 결과가 어떻게 될까? 옥에 갇힌 채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교회들은 어떻게 될까? 특별히 지금 편지를 쓰고 있는 빌립보 교회는 어떻게 될까 등 그가 이와 같은 염려하고 있음이 빌립보서의 행간에서 잘 배어나오고 있는 것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습니다. 20세기의 실존주의 철학자들이 강조하듯이 염려라고 하는 것은 인간 실존의 본질에 해당하죠. 인간은 신이 아닌 피조물이라는 한계성과 결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염려하지 않을 수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라’는 권면에 즉각이어서 ‘모든 일에 기도로 하나님께 아뢰라’는 권면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주 안에 있는 사람들은 염려가 마음 속에 일어날 때마다 그 즉시 기도로 전환해 나아가야 함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 있는 염려를 극복하기 위해 하나님께 기도로 나아가는 것이 최고의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은 기도를 강조하기 위해 기도라는 의미의 표현을 세 번이나 되풀이하고 있는데요. 6절 말씀에 나오는 ‘기도’와 ‘간구’ 그리고 ‘아뢰다’가 이 세 가지에 해당합니다. 맨 처음 나오는 “기도”라는 말은 헬라어로 ‘프로슈케’라는 단어인데, 하나님과 대화하는 모든 행동을 다 포함하는 보편적 의미에서의 기도를 표현하는 말이고요. 두 번째 나오는 “간구”라는 말은 헬라어로 ‘데에시스’라는 단어인데, 하나님께 구체적인 것들을 간청하는 청원의 기도를 의미합니다. 이에 더하여 사도 바울은 세 번째로 더욱 구체적인 뜻을 담아 6절 말씀에서 “너희의 구할 것을”이라는 표현을 명시하여 하나님께 아뢰라고 권면하죠. 그러므로 기도는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 우리가 간구할 구체적인 내용을 담은 간청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 우리 모두가 믿는 하나님은 너무 어려워서 들어주기 힘들거나, 너무 시시해서 안들어주시거나 하는 그러한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간구에 귀를 기울이시는 분이세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우리의 마음에 짐이 되는 모든 것들을 반드시 하나님께 아뢰야 합니다. 우리들은 가끔씩 우리가 만나게 되는 문제가 너무나 엄청나 어찌 하나님인들 해결하실 수 있을까 생각하거나, 또는 우리가 염려하는 문제가 하나님 보시기에 시시한 것 같아 차마 하나님께 아뢸 수가 없을 것 같다고 느껴질 때도 있죠. 그렇기 때문에 이와 같이 생각하는 우리들을 위해 사도 바울은 그러한 “모든 것들”을 하나님께 아뢰라고 권면합니다. 또한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 “모든 것”을 아뢰되 “감사함”으로 아뢰라고 말씀하고 있는데요. 우리의 기도 가운데 응답하실 하나님께 대한 믿음으로 감사하며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기도는 하는데, 그 기도가 응답되지 않을 것 같고, 우리의 상황도 여전히 캄캄한 것 같을 때도 있죠. 아니 그럴 때가 거의 대부분이실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럴 때 우리는 뒤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그동안 살아온 지난 날들을 돌아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 당시에는 미처 깨닫지 못했었지만, 하나님께서 그동안 나의 인생을 어떻게 선한 방법으로 인도해 오셨는가 에벤에센의 하나님을 새롭게 깨닫게 되죠. 이 깨달음은 너무 중요한데, 이 깨달음을 통해 우리는 지난 날 내 인생에 개입하셔서 선한 방법으로 인도해주셨던 하나님께서 지금 내가 당면한 캄캄한 상황에서도 전과 같이 구원해 주실 것을 확신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깨닫게 될 때 우리는 더욱 확신에 찬 기도를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간구 가운데 귀 기울여주시고, 응답하시는 분이십니다. 캄캄한 상황 가운데에서도 반드시 우리를 선한 길로 인도해주실 분이십니다. 그 하나님을 의지하며 모든 염려 내려놓고, 기도로 승리하시는 여러분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하나님의 평강이 지키시리라
마지막으로 7절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 “주께서 가까우시다”는 확신 가운데, 주 안에서 기뻐하고, 모든 사람들을 관용하고, 염려를 떨쳐 버리고 기도와 간구에 힘을 쓰면, 7절 말씀에서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지키다”는 동사는 헬라어로 “프흐루레오”라는 단어인데, 이 단어는 군사 용어로서 마치 로마 군대가 빌립보를 감싸고, 적군들로부터 보호하듯이 지킨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쉽게 말씀드리면, 우리 나라의 수도방위사령부가 서울을 보호하여 적군으로부터 방어하듯이 한다는 의미인 것이죠. 우리의 대적인 악한 사탄 마귀는 항상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공격합니다. 상대방은 우리에 대해서 아무런 생각을 하고 있지 않는데, 우리들 스스로가 그 상대방을 오해하여 넘어지게 만들기도 하고요. 때로는 가정이나 우리가 다니는 직장 또는 교회 내 공동체 속에서 여러 험담이나 비판과 오해들을 통해 우리들의 염려가 더욱 커지게 만들곤 하죠. 그렇게 되면, 우리 안의 평강은 금방 사라지고, 기쁨도 잃어버리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할 때 일수록 우리가 해야하는 것이 있는 데, 그것은 바로, 주께서 가까우시기에,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권면이 이 네 가지를 우리는 실천해야 합니다. 주 안에서 기뻐해야 하고요. 모든 사람들을 관용해야 하고요.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 줄 아십니까?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둘러 진치고 방어하여서, 사탄의 그 어떠한 공격도 침투하지 못하도록, 우리를 지켜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할 때 우리는 무엇을 느끼게 되냐하면, 7절 말씀에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죠. “모든 지각에 뛰어난” 그러니까 우리의 이성으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는 놀랍고도 신비스러운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게 될 것이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로 인하여 우리 안에 하나님의 평안으로만 가득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안에 하나님의 평안으로 가득 채울 수 있는, 아니 차고도 넘칠 수 있는 방법인 것입니다.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알파교회 성도 여러분, 주께서 가까우십니다. 주님 우리를 언제 부르실지 모르세요. 그리고 주님은 우리 가까이에, 아니 우리 안에 계십니다. 그러니까 우리 함께 기뻐하십시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에게 관용을 베풀고,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기도로 하나님 아버지 앞에 나아가십시다. 그리하면, 사탄의 그 어떠한 영적 공격에도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둘러진 치고, 지켜주셔서, 세상이 줄 수 없는 우리 주님만이 주실 수 있는 하나님의 평안이 충만히 넘치도록 해주실 것입니다. 이 믿음으로 승리하는 삶 사시는 우리 알파교회 모든 성도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